대한제국의 광무개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광무개혁은 1897년 대한제국이 완전한 자주 국가가 되기 위해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까지 서구 열강의 세력균형기에 자주적으로 결단하고 실행한 내정개혁이다. 대한제국이 1897년 최초로 알린 측량, 무게에 관한 법에 따라 그 당시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측량과 무게의 기준이 한가지로 통일되었다. 그 해 대한제국 정부는 지적조사(토지대장에 기록하는 일)를 실시하여 소유지 전체 체계를 서구식으로 근대화시키고자 했다. 이 개혁 정책은 토지세 개혁과 관련이 있으며 대한민국의 화폐 제도의 개혁을 맡았던 이용익이 토지세 개혁을 담당했다. 지적조사를 실시한 이후 토지를 정확하게 측정한 지계가 곧 발행될 참이었다. 그러나 토지 개혁은 러일 전쟁 발생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이처럼 광무개혁은 대한제국을 근대화, 서구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시작하였고 대한제국은 산업 혁명의 후발주자로 나섰다. 곧이어 1898년 한성전기회사가 세워졌다. 1896년 최초로 전화기가 한국에 도입되었고, 6년 후인 1902년 장거리 공중전화가 최초로 개설되었다. 1899년 대한제국 정부 관할 아래 서북철도국이 세워졌다. 또한 광무개혁 동안 산업 진흥 정책도 추진되었다. 이처럼 대한제국은 광무개혁 동안 도시의 산업기반시설도 갖추기 위해 애썼다.
일본의 간섭 심화
러시아와 일본이 갈등의 마찰을 빚으면서 1904년 2월 23일 러일 전쟁이 발생했을 무렵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고 나아가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맺은 다음 외교와 재정을 대표한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대한제국 내부 정치에 참견하였다. 이때 고문으로 들어온 메가타 다네타로는 이른바 화폐정리사업으로써 대한제국의 토종 자본을 몰락시켰다. 동시에 일본 제국에 따라 일본 대한제국 외교 고문을 맡게 된 미국은 더럼 스티븐슨은 일본의 침략 의도 미화에 나섰다. 더럼 스티븐슨은 시간이 지나 전명운과 장인환 의사에게 미합중국 오클랜드 기차역에서 처분되었다. 1904년 만주와 한반도 패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발생하였다. 이해 일본 제국은 1905.11.17 제2차 한일 협약을 일방적으로 공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한성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한반도를 둘러싼 통감 정치가 시작되었다. 러일전쟁은 1905년 일본 측이 승리해 러시아와 일본 간의 포츠머스 조약의 협약으로 결론이 났다.
국권 수호 운동의 움직임, 의병.
조병세는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 운동을 벌였고 민영환은 스스로 순국 자결을 통해서 맞서 반항하였으며 장지연은 본인이 주필로 있었던 황성신문에 사설인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일본의 침략과 을사오적을 성토하면서 을사늑약의 그름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을사오적 암살단이 만들어지면서 을사오적의 저택들을 불태우고 일진회 사무실을 강습하였으며 최익현, 신돌석, 민종식은 의병을 구성하고 조직해 무장 항쟁을 계획하며 시도했다. 잇따른 외교권 박탈과 일본의 거세지는 간섭으로 인해 지식인층과 양반 중심으로 일본 제국의 침략을 성토하고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내세우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여기에, 독립협회가 해체되고 나서 헌정연구회와 같은 개화 자강 계열과 같은 여러 단체가 세워지고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대립하고 항거하면서 구국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이후에는 신민회, 대한 자강회, 대한 협회를 대표로 삼은 개화 운동과 독립협회 활동을 이어받은 사회 변화와 발전을 바라는 지식인층들이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추락한 국권을 회복시키려는 애국 계몽 운동을 펼쳤다. 초반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고 무산시킨 보안회와 입헌 군주제를 시행하고자 만든 헌정연구회의 활동이 돋보였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서상돈과 김광제가 제안한 국채보상운동이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이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이 대한제국은 경제상 종처럼 얽매이게 제공한 빚 약 1,300만원을 국민들이 직접 갚아나가고자 발생한 운동이었으나 이런 애국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은 일본 제국 통감부가 압박하고 방해하면서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이 애국계몽운동은 산업과 교육, 언론 활동을 이용한 실력 양성 운동을 계획하고자 하였다. 이런 국권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여러 운동은 민족 독립운동 전략과 사상을 제시하고 장기간에 걸친 민족운동 기반을 구축했다는 가치의 뜻이 있으나 일본에 의한 대한제국의 지배와 침략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게 된 오류를 범했다는 평가도 지목된다. 다시 말해, 그 당시 일본 제국에 군사상으로나 정치상으로나 묶여있던 상황에서 모든 게 전개되어 성과 면에서는 한계성이 겉으로 드러난 셈이다.
마지막 군주국 대한제국의 멸망
고종황제는 기밀 밀서를 작성해 서구 열강 국가에 을사늑약의 불법 협약과 조약 무효임을 널리 고하고자 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 간의 세력 대립, 갈등이 종료되고 일본으로부터 1905.11.17 제2차 한일 협약 때 외교권 등을 갈취당한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1907년 4월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말로 일본에 의해 고종황제가 7월 20일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 황제가 이어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라 하였다. 순종 황제가 즉위한 직후 일본은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체약하여 대한제국 정부 조직의 부와 처에 일본인 관리를 두어 대한제국의 내부 정치에 노골적으로 끼어들고 간섭하였으며 이면 협약을 통해 8월에서 9월에는 군대를 강제로 해체했다. 1909.7.12 교도행정과 사법권에 대한 전반적인 업무를 일본 측에 반강제적으로 넘겨주게 되고 (기유각서) 이에 대한 제국은 단지 명목상의 국권만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전국적인 의병 활동과 저항을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억눌렀다. 조약 협약과 동시에 한반도의 마지막 군주국인 대한제국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고 한반도에서 약 5,000년 간 지속하던 군주제가 마침표를 작성하게 되었다. 마침내 일본은 1910.8.22 한일 병탄 조약을 협약하고 8월 29일 이를 선고함으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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