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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러시아의 역사2 (근대)

by 아몬드봄봄 2023. 2. 15.

러시아의 근대를 살펴보자.

 

초반의 짧은 섭정 기간을 마친 후, 이반 4세가 1547년 차르로서 즉위한다. 여기서 말하는 '차르'란 제정 러시아 때 황제의 칭호이다. 이후 권력이 분산된 모스크바 대공국 시대가 종료되고 중앙 정부에 집중된 통치 형태를 가진 러시아 차르국 시대가 형성되었다. 타타르 구속으로부터 빠져나온 모스크바 대공국의 군주 이반 4세 (이반 3세의 손주)는 고작 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군주로 자리 잡는다. 이반 4세의 통치 시기는 매우 강력했고 이 기간에 해외 영토가 크게 확장되고 중앙 집권제가 수립되었지만, 이반 4세 사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승계 문제로 인해 류리크 왕조가 끊기면서 러시아 차르국은 질서가 무너지고 소란스러워졌다. 초반의 로마노프 왕실의 차르들은 권력이 그다지 세지 않았으나 매우 강력한 표트르 대제가 등장함으로써 러시아 차르국은 러시아 제국으로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 1613년 이반 4세의 처가인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 1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로마노프 왕조가 형성되었으며 이 시기에 이반 4세의 아들인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3명이 등장하였다.

 

러시아 제국 형성

17세기 말, 차세대 차르로 등극한 표트르 황제가 서구 문화를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고 이때부터 러시아는 겨우 동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러시아 제국은 1721년 표트르 대제 이후부터 제 1차 세계대전 가운데 1917년 3월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질 때까지 존재했다. 앞서 말했듯이,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시기에 급진적인 서구인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한 러시아는 발트해까지 세력을 넓히길 원했고 대북방 전쟁에 참여하며 이윽고 발트해에서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황제의 칭호를 '임페라토르'로 정식으로 채용하였다. 이는 로마 황제의 정식 칭호였으며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이라는 국호를 제정한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진짜 근대화가 시급한 농업 지역에는 개혁의 영향이 도달하지 않아 농노제는 계속해서 존재했고 예카테리나 시대에는 심지어 농노제의 규모가 커지기까지 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톨스토이 단편소설에 농민들이 나올 정도로 이들은 이 시대에 슬프고 끔찍한 삶을 살았다. 알렉산드르 2세 때는 더 적극적으로 러시아 근대화에 몰입했다. 이는 크림 전쟁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에 패배한 영향이 컸고 알렉산드르 2세의 시기에는 농노 해방령을 대표적인 근대화 작업으로 꼽는다. 하지만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농민들이 거주할 토지가 사라져 도시에는 농노 출신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1881년 알렉산드르는 암살당했고 알렉산드르 3세에 이르러 전제정치는 더욱 강해졌으며 부황이 시행했던 대학 자치제 같은 자유주의가 부분적으로 국한되었다. 1906년 4월 24일, 헌법이 제정되었고, 의회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1889년 근대적 헌법을 적용한 일본보다도 늦었다. 알렉산드르 3세 못지않게 니콜라이 2세도 전제정치를 시행했다. 그는 러일 전쟁에서의 패배에 대한 비난과 이 결과에 따른 많은 노동자가 기병대로부터 살해당한 일명 '피의 일요일' 사건을 겪은 후 마침내 개혁을 시행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 러시아 군은 프로이센 동부 지방을 침격, 점령하였다. 하지만 연합국 세력에게 패배하여 동부 지역 전선은 프로이센에서 우크라이나 지역 쪽으로 서서히 물러나게 되었고 러시아 제국은 1917년, 이 같은 전쟁으로 인해 생긴 어마어마한 재정적 손해와 무질서 가운데 군인들의 기세도 꺾이게 되었다. 따라서 차르 정부를 배척했다. 가난한 노동자 계급들이 제일 앞장서서 차르 정부의 퇴각을 요구했고 이 결과 2월 혁명으로 번지게 되었다. 마침내 니콜라이 2세는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 권력은 임시정부로 이전되었다.

 

러시아의 현대, 소비에트 연방

볼셰비키는 1917년 10월 수도 페트로그라드를 손에 쥐고, '소비에트'라는 이름으로 정권을 잡았다. 소비에트(러시아 혁명 위원회)는  임시정부가 수립 이후에도 해제하지 않았으며 이 중 볼셰비키파(블라디미르 레닌을 대표로 하는 단체)는 대중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다. 볼셰비키는 1918년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에서 동시에 제정을 찬성하고 내세우는 세력을 당파 해야 했고 독일과 불평등 조약을 통해 국내와 국제적 고립에서 빠져나오고자 했다. 1920년 볼셰비키는 약 천 삼백만명의 희생자를 발생시키며 내부 전쟁에서 승리했다. 러시아 제국은 이로써 소비에트 연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

1917년 2월 차르 황제가 자리에서 물러난 후 수립된 러시아 임시정부는 단계적이고 점차적인 개혁을 시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 특히 독일과 전쟁했을 때 사회적 혼란이 가장 심했다. 게다가 우유가 모자라 어린아이들이 먹을 게 없을 정도로 심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레닌이 이끌고 있던 볼셰비키는 러시아 임시정부 측에 휴전을 제안하였으나 이는 당연히 거부당하였다. 동년, 11월 7일 레닌이 이끄는 10월 혁명이 일어났다. 10월 혁명에 불찬성하는 백위군(1917년 공산당의 적군에 대항하여 정권을 다시 찾으려고 왕당파가 조직한 반혁명 군)과 외국 열강의 군부대에 반발하려고 레온 트로츠키는 적위군(러시아 혁명 기간인 1918년 1월, 차르 정권을 뒤엎고 볼셰비키의 지도 아래 노동자들로 편성한 군대)을 붉은 군대로 재편성했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적위군을 편성해 페트로그라드(러시아 제국의 수도)를 접수했다. 이후 모든 반발하는 무리를 대거 숙청해 러시아에 있어서 볼셰비키의 일당 독재 지배를 마무리 지었으며 일본 포함, 여러 열강에 의한 간섭 전쟁과 시베리아 출동 또한 백군과의 내부 전쟁에 승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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