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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마야문명 두번째

by 아몬드봄봄 2023. 1. 20.

지난 글에 이어서 마야문명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보자.

 

마야 도시의 각 범위 안의 지역들은 잘 만들어진 도로를 따라 연결되어 있으며 도시는 주로 상징적인 공놀이 경기장, 석조 궁전, 피라미드 형식의 사원들, 천문을 들여다보기 위해 세워진 천문대 등이 존재했다. 마야의 지식인층들은 모두 글을 읽어서 뜻을 이해하는데 탁월했고 어렵고 복잡한 체계를 가진 상형문자를 완성하여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기 전에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언어 구조를 창조해내는 데 성공했다. 마야의 도시들은 질서 없이 쭉 뻗어나가는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이곳의 중심 부분에는 신들에게 바치는 사원들이 많이 있었고 거대한 궁전들도 많이 존재했다. 또 그 주변에는 거주 지역들이 뻗어있었다. 마야인들은 매우 복잡한 그들만의 달력 체계와 이론을 창조해냈다. 그리고 최초로 수학에 0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기도 했다. 마야의 종교적 가치에는 인신 공양도 들어있었다. 마야인들은 그들의 책 속에 자신들의 신화와 역사를 기록했는데 스페인 식민지 시절 아주 많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3권밖에 현존해있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의 고고학자들은 주로 마야의 석비 또는 건축물들에 새겨진 문자들을 사용하여 고대의 역사를 해독하고 있다.

 

마야 문명 사회

세월이 흐르며 마야 지역의 인구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내부 사회는 갈수록 전문화되었으며 정치사회 또한 구체적이고 복잡해졌다. 마야 사회는 선고전기 이래 평민과 귀족 이 두 계층으로 극명히 나뉘었다. 인구수가 절정에 이르고 수많은 마야의 도시들이 복잡한 교역로로 연결돼 있던 고전기 후기에 치달았을 때 마야 인구 내의 빈부 격차도 꽤 차이가 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산층들은 대부분이 군인들, 중농들, 장인들, 하급 사제들, 하급 관료들, 상인들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평민들의 대다수가 노동자, 소농들, 하인들, 노예, 빈민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추측한다. 그들 조상들의 무덤을 공동의 조상을 가진 혈연 공동체 소유의 땅에 묻는 것은 씨족과 그 토지와의 관계를 더 가깝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흔하게 행해졌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이 당시 마야 지역의 땅은 씨족이나 귀족들의 것이었으며 모든 토지는 그들의 자손들에게 세습되었다.

 

마야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

가톨릭교 사제와 신부들은 마야 문명에 대해 수없이 연구하고 기록했다. 그렇지만 이 목적은 원주민들을 더 이해함으로써 가톨릭을 보다 더 쉽게 선교하고 스페인 제국 문화를 더 빠르게 퍼뜨리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후 중앙아메리카와 유카탄 반도를 방문한 수많은 식민지 관료들과 선교사들이 이 행보를 계속했다. 1839년 영국인 건축가 프레드릭 캐서우드와 미국의 여행자이자 작가인 존로드이 스티븐스는 몇 개의 마야 유적지들을 방문하였다. 19세기 이후에는 마야에 대한 보다 집중적인 연구가 계속되어 그 당시 문명에 대한 기록적인 발굴과 발견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마야 상형문자 해석을 이때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삽화를 넣어 출판한 여행 기록은 주변 서구 국가 가운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마야 문명을 재조명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야 문명은 19세기 마지막 20년 동안 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한 고고학의 깊숙한 연구 목표가 되었다. 피바디 박물관은 20세기 초 코판 발굴 작업을 후원하며 뒷받침하였고 그 밖에 다른 도시들을 발굴하는 데에도 지원하였다. 그 작업에는 테오베르토 말러와 알프레드 모드슬레이가 앞장서 있었다. 신들과 여신들의 구별, 마야 달력의 해석, 종교관, 날짜 등이 20세기의 첫 20년 동안 강하게 드러났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수많은 원정대가 형성되어 마야 문명 지역 전체에 큰 규모의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1960년대 유명한 마야 전문 학자인 에릭 톰슨이라는 인물은 마야의 도시들이 사실상 하나의 큰 예배용 장소라고 의견을 내세웠으며, 마야 주민들은 도시에서가 아니라 그 주변 변두리의 숲에서 거주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또한 에릭 톰슨은 이 문명이 평화로운 사제, 천문학자들에 의해 통치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점점 마야의 서적들이 1950년대부터 해석되기 시작했다. 그 안에 적혀있던 싸우기 좋아하고 가혹한 마야 지도층들의 업적이 세상에 발각되었고 마야인들이 평화로운 사람들이었다는 주장은 갈수록 약해졌다. 하지만 이 의견은 20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마야 문명의 계승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는 마야 문명의 대부분의 고유한 색채가 사라져버렸으나 스페인 정부의 영향력이 비교적 못 미쳤던 외딴 마을에는 마야 문명이 그나마 잘 버틸 수 있었다. 마야 문명의 전통적, 가족 사회는 여전히 그들만의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면서 살았고 콩과 옥수수를 주식으로 했는데 이는 메소아메리카식 식습관이 유지된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 측에서 들여온 철제 농기구로 인해 마야의 농업 생산성을 도리어 향상되었다. 마야 전통 시장도 스페인 정복 이후 오랫동안 유지되었고 직조, 도자기, 바구니 짜기 같은 전통 공예도 여전히 이어지기도 했다. 또 도리어 스페인 정부는 세금을 보다 더 많이 걷어 내기 위하여 전통 방식의 시장들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마야의 언어와 전통 신앙은 적극적인 가톨릭 선교사들의 선교에도 불구하고 꽤 오랜 기간 살아남았다. 마야인들은 마야 달력을 철학적인 개념에서 접근했고 행성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측정하여 달력에 추가했다. 1년이 260일인 마야 문명의 전통 달력은 현재까지도 과테말라 북쪽에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도 수천 명의 원주민이 마야어를 자신의 모어로 사용하여 마야 문명의 전통을 이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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