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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마야 문명 건축 그리고 천문학

by 아몬드봄봄 2023. 1. 25.

마야의 건축에 대해서

마야인들은 건축 분야에서 확실히 뛰어났다. 전문적인 석공들과 이 같은 인력을 동원할만한 정치적 구조나 사회적 구조가 있었기에 마야에는 석조 건물들이 많이 존재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전문화된 석공들 덕분에 마야에는 다수의 도시 유적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은 계단과 건물 벽에 상형문자를 새겨넣기도 하였으며 그 밖에 다양한 모양의 건물들을 건축했다. 마야 코판에 있는 웅장한 궁전은 한 명의 일꾼이 대략 10,686일 동안 꼬박 일해야 지을 수 있는 것으로 예상된다. 건축 인력의 약 65%는 채석, 돌 다듬기, 돌 이동시키기 같은 일에 쓰였을 것이며 나머지 24%의 인력은 벽토 칠하기와 만드는 일을 했다. 또한 이 밖의 다른 인력들은 상형문자들을 새기기, 장식을 만들기, 벽화 칠하기 등 건물 짓기를 마무리하는 일에 쓰였다. 코판에 있는 상류층의 집은 짓는 데 보통 두세 달이 걸렸으며 약 80명~130명의 일꾼이 가담하였다. 마야 역사상 가장 큰 건물들은 선고전기에 세워졌으며 마야 후고전기가 되고 나서는 전문화된 조각사들과 석공들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전문적인 기술을 갖춘 설계사와 건축가도 따로 존재했다. 전성기의 티칼은 약 20 평방 제곱킬로미터 정도를 차지했었는데, 이중 도심 지역만 따져봐도 약 6 평방 제곱킬로미터였다고 한다. 이 같은 한 도시를 짓기 위해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었고 수십만의 일꾼들이 가담했다. 

 

마야의 도시에 대해서

마야 도시의 중심지에는 지배계층과 귀족들이 살았다. 이곳에서는 종교 예식이 치러졌으며 도시의 행정 기능도 성립되었다. 백성들이 이 한 곳에 모여 중요한 행사나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일반 계층의 평민들은 도심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외곽 지역에 모여 살아야 했고 상류 지배층들은 도시 중에서 최고 중심인 곳에 주택을 자리 잡고 살았다. 마야의 도시들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확장되는 등 계획도시가 아니었다. 대개 왕족들의 신전이나 귀족층의 저택이 세워질 때마다 마야의 도시는 불규칙한 팽창을 했으며 대부분의 도시는 중심지에서 외곽지로 확장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단, 몇 개의 주요한 건물들 위에 새로운 건물을 덧입히는 방법으로 도시를 다시 세우기도 하였다. 마야 도시들의 중심에는 대개 상징적이거나 공적인 궁전들 또는 신전이 존재했으며 그 건물 주위를 둘러싼 거대한 주거 지역이 있었다. 도시 중심의 일부는 매우 신성하게 여겨지는 지역들이 있었고 이곳들은 주로 일반 주거 지역들과 벽으로 구별되었다. 대개 이러한 지역에는 엘리트층에서 바쳐진 왕궁들이나 피라미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지배 왕조의 왕권 강화를 높이기 위해, 기념물들이 이곳저곳 세워졌으며 도시 최고 중심부에는 학교, 시장과 광장, 성스러운 공놀이 경기장 등이 있었다. 불규칙하게 섞인 보도들이 도시의 각 지역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해주었으며 이 보도들이 만나는 곳에는 또 다른 새로운 주거 지역이 생겨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주민들은 일부러 혼란하고 부산스러운 도시의 중심지에서 떠나 외곽지역에서 거주하기도 했으며 특히 일부 상류층들은 자신들의 집을 왕실의 저택과 같이 지어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기도 했다. 대개 마야의 주거 지역들은 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우기 때 빗물에 집이 휩쓸려가지 않는 대비가 가능했다.

 

마야의 천문학에 대해서

고대 마야인들은 천문학이 신과 하늘의 뜻을 알아내고 소통할 수 있는 해답이라고 여기고 이를 열렬히 탐구했다. 마야인들은 끊임없이 태양, 별, 달, 금성의 위치를 파악하고 기록했다. 또 흥미롭게도 이렇게 기록된 정보들은 대개 점성학에 많이 이용되었다. 마야의 기록으로 볼 때, 일반적으로 사제들은 별들을 관찰할 때,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맨눈으로 막대기만을 이용하여 명확성을 기했다. 대부분 천문학은 앞서 말한 사제들을 위하여 과거 시절에 대해 보다 더 면밀히 연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였으며, 이를 주축으로 삼아,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예언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용되었다. 마야인들은 과학적인 이유로 농사 주기를 알아보기 위해 하늘을 관측하지 않았으며, 우주를 연구하지도 않았다. 사제들은 또한 별들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를 면밀히 연구하였고 월식과 일식 등을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만약 이 별이 이전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수평선 바로 위에 있었다면 그 다음번에도 동일한 별이 수평성 바로 위에 있을 때 또다시 전쟁이 발생할 것이라고 믿었다. 스페인 접촉기 당시 마야를 방문했던 유럽인들에 따르면 마야인들은 이미 일반적인 천문 상황들을 관측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같은 시기의 유럽보다 더 정확했다고 한다. 마야 권력층들은 금성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을 때 전쟁을 시작했다. 더 나아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전쟁 포로들을 그에게 바치는 등의 방법으로 운수를 기도하기도 했다. 마야인들은 화성, 목성, 수성 등 맨눈으로 보이는 대부분의 태양계의 위성들을 관측하곤 했다. 또한 마야인들은 지구와 금성의 회합주기를 584일로 계산해냈는데 이것은 단 2시간의 오차범위만 존재했다. 금성이 샛별로 떠올랐을 때는 이것이 마야의 영웅들이 다시 태어났다고 여겨졌는데, 다시 말해 그들은 이것을 부활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금성이 신출했을 때는 재앙과 파괴를 뜻하는 운수가 좋지 않은 기운으로 여겼다. 그리고 금성은 앞서 말했듯 전쟁의 상징이었다. 또한 월식, 일식은 지구의 멸망을 뜻하는 극단적으로 위험한 징조라고 생각했다. 마야인들은 이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 마땅한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확신했다. 드레스덴 코덱스에 의하면 상형문자로 먹혀가고 있는 태양이나 달의 형상으로 표현되었고 일식은 뱀이 태양을 삼키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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