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남부와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과테말라 일부를 아우르는 문명권, 유카탄 반도를 중심으로 한 중앙아메리카에서 마야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마야 문명은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과 독특하고 복잡한 상형문자와 조각 미술을 가진 농사 기반의 고대 중앙아메리카의 선진문명을 뜻한다. 마야의 인문환경은 대단히 복잡하고 얽혀있다. 건조한 사막과 추운 고지대 그리고 고온다습한 저지 산림과 깊은 골짜기 등 지리가 꽤 험하고 복잡하다. 이러한 지리와 지역 환경은 마야 문명 창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야 문명의 무역
마야의 주도권을 가질 정도로 힘이 강했던 도시에는 중요한 교역로들이 존재하고 있어서 이에 세금을 걷었다. 마야 문명은 당시 도시 국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마야 문명에서 무역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과테말라 고지의 강력한 도시들, 예를 들어 쿠마카즈나 카미날후유 또는 엘살바도르에 위치한 찰추아파 등의 도시들은 마야의 흑요석 제공을 막았으며 이에 막대한 이익을 챙기기도 하였다. 유카탄 반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와 도시들은 바다와의 근접함을 기반으로 하여 소금의 생산을 담당하였으며, 특히 후고전기에 접어들어서는 메소아메리카 전체 지역에 노예무역이 판을 치게 되었다. 마야 문명에서는 생활용품, 갑옷, 일상 옷 등을 주로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솜이 매우 중요한 생산품이었다. 마야인들은 메소아메리카 지역을 넘어서 이동하기도 할 정도로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서 무역을 행하였으며 심지어 고전기 초기 때의 시장 유적들과 상회가 멕시코 중부와 테오티우아칸에서 발견되기도 할 정도였다. 치첸이트사는 고전기 초기부터 뉴멕시코주에서 옥, 그리고 파나마와 콜롬비아 지역에서 황금을 들여오는 무역의 최고 중심지였다. 메소아메리카 바깥의 교역로들은 대개 멕시코 중부와 걸프 만에 모여 있었다. 실용품들과 사치품들 같은 대형 거래는 거의 왕실 측에서 감독하였다. 이러한 교역을 통해 수확한 자원과 부는 대개 동맹 도시나 국가에 선물하여 동맹을 강화하거나 왕족들의 허영심을 채우기도 하였다. 마야의 교역로가 변화함에 따라 지역 농촌에 불과하던 도시가 대도시로 성장하기도 하고, 발전했던 도시가 쇠퇴하기도 하였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마야 고지대의 살던 원주민들은 지형 특징 덕분에 스페인의 간섭을 받지 않아 바닐라나 카카오 같은 귀한 물품을 보급했다. 이 같은 변화는 스페인의 탄압 조치도 이 교역 문화를 완벽히 차단할 수 없었고, 마야 문명의 선고전기, 고전기, 후고전기 내내 계속되었다.
마야 문명의 시장 문화
스페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야 땅에 도착했을 당시 이미 그곳에서 시장 문화가 발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야의 시장 고적은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것이 얼마 없다. 고고학자들은 몇 개의 고전기 도시에서 시장 거치대같이 생긴 평평한 돌 무리와 석각 회랑들 다량 발견했다. 또 이 부근에서 찾아낸 토양과 현재 과테말라에 자리 잡고 있는 마야 전통시장의 토양 성분을 분석, 대조해본 결과, 두 곳의 토양 전부 다 높은 함유량의 인과 아연이 검출되었다. 이 연구는 이 지역에서 비슷한 채소와 곡물을 길러 판매했다는 사실과 비슷한 음식을 먹었다는 증거를 나타낼 수 있다. 이 연구과 자료를 기반으로 시장 체계와 구조를 재현해보고 복잡도를 새롭게 구성해본 결과 적어도 마야 문명 고전기 초기부터 앞서 발달한 시장 문화와 경제가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마야에 도착했을 시기에는 벌써 커다란 광장 안에 활발하고 지속적인 시장이 존재헀었으며 이 시장을 관리하고 감독하고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관리들과 세전을 걷는 세관이 따로 있었을 정도라도 전해진다. 그 후에도 몇몇 고고학자들은 동일한 방법으로 무수히 많은 옛날 폐허들에서 마야 시장의 남아 있는 자취들을 발굴해냈다.
마야 문명의 상인
마야의 시장 고적이 많이 발견되지 않은 만큼 마야의 상인들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많이 없다. 상인들이 많은 물건을 실은 채로 다른 도시들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은 거의 지하세계를 나돌아다니는 것처럼 위험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므로 그 당시 상인들의 수호신은 가방을 메고 있는 2명의 지하세계의 신들이었다. 마야의 상인들은 그들의 물건을 운반할 때 동물을 이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짐들은 하인들이나 노예들이 가방을 메고 다녔다. 바다를 통해 물건들을 옮겨야 할 때가 오면 카누를 이용하였다. 카누는 커다란 빈 나무들로 제작되었으며 대개 2.5m 정도의 너비였고 약 25명 정도가 노를 저어서 이동했다. 그 당시 카누를 통한 무역로 중 하나가 온두라스 지역에서 콜럼버스와 맞닥뜨렸다. 상인들이 여행을 떠날 때는 온몸을 검정으로 칠하여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는 등 말 그대로 중무장을 한 채로 다녔다. 이들은 몇몇 도자기와 같은 유물에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적어도 그들 중 몇 명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음을 예측할 수 있다. 마야 전문가들은 스페인 식민 시절 동안 마야의 귀족층들은 원거리 교역에 꽤 활발하게 관여했던 것으로 예측한다. 단, 대개의 상인은 중산층 계급이었고 그들 중 대부분이 국지적이고 지역적 교역 활동에만 집중했다고 여겨진다. 주요 다루어지는 물건들에는 도끼, 카카오, 직물, 흑요석, 음식, 도자기, 음료, 종 등이 있었다. 그중에 특히나 카카오는 신의 음식이라고 여겨졌는데, 빈 껍데기 속에 아보카도 껍질이나 아무 흙을 채워 넣는 식으로 가짜를 만들어 팔기도 할 정도로 매우 귀한 음식이었다. 먼 곳으로부터 상품을 수입해오거나 수출하는 것은 고위 상류층들 사이에서만 행해졌다.
'역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야의 종교 이야기 (0) | 2023.01.26 |
---|---|
마야 문명 건축 그리고 천문학 (0) | 2023.01.25 |
마야 문명 세번째 (0) | 2023.01.20 |
마야문명 두번째 (0) | 2023.01.20 |
아메리카 역사의 시작과 마야 문명 (0) | 2023.01.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