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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마야 문명 세번째

by 아몬드봄봄 2023. 1. 20.

마야 사회 세번째 이야기!

세월이 흐르며 마야 지역의 인구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내부 사회는 갈수록 전문화되었으며 정치사회 또한 구체적이고 복잡해졌다. 마야 사회는 선고전기 이래 평민과 귀족 이 두 계층으로 극명히 나뉘었다. 인구수가 절정에 이르고 수많은 마야의 도시들이 복잡한 교역로로 연결되었던 고전기 후기에 치달았을 때 마야 인구 내의 빈부 격차도 꽤 차이가 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산층들은 대부분이 군인들, 중농들, 장인들, 하급 사제들, 하급 관료들, 상인들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평민들의 대다수가 노동자, 소농들, 하인들, 노예, 빈민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추측한다. 그들 조상들의 무덤을 공동의 조상을 가진 혈연 공동체 소유의 땅에 묻는 것은 씨족과 그 토지와의 관계를 더 가깝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흔하게 행해졌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이 당시 마야 지역의 땅은 씨족이나 귀족들의 것이었으며 모든 토지는 그들의 자손들에게 세습되었다.

 

마야 문명의 정치 사회로 가보자.

마야의 도시국가들은 마야 문명의 역사 내내 다양한 정치구조를 가졌으며 왕과 족장의 구별도 확실하게 하지 않았다. 잉카 제국이나 아스텍 제국과는 다르게 마야 문명은 존재하는 동안 한 개의 제국이나 거대한 왕국으로 통합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러한 복잡하고 무질서한 정치 체계는 마야 사회 내의 국가 간의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는데 각 제국의 지도자 간에 연합, 동맹, 전쟁, 적대, 복속 등의 복잡하고 끊임없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사라지기를 거듭했다. 어떤 때는 티칼, 마야판, 카라콜, 칼라크물과 같은 특수 정치 체계가 지역적인 강세를 차지하기도 했다. 선고전기 후기에는 대부분이 신정정치 체계로 통일되었다. 여기서 신정정치는 지도자가 종교의 후원, 지지받으며 교단, 상장, 복잡한 예식 등과 같이 종교적인 것들과 정치가 뗄레야 뗄 수 없는 매우 가까이 얽혀있는 정치 구조이다. 마야의 저지대에서 최초로 발견된 지배 체계는 대략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의 신성한 왕만이 국가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고 군사, 경제, 사법 등 전반적인 국정을 담당했다.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는 매우 신성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마야 문명 전성기 시절, 왕은 따로 군사력이나 경찰력 없이도 평민, 귀족과 같은 백성 모두를 자기 말에 순순히 따르게 할 수 있었다. 정치 쪽에서는 중간 계급이 내부에서 발생하는 다툼 등을 중재하고 나라의 자원 등을 분배하는 일에서 완화 역할을 충분히 했을 거라고 추측된다. 몇몇 도시는 왕족들 중심보다는 능력 중심으로 사람들을 쓰기도 했고 행정부의 기능을 강화하기도 했다.

마야의 상류층들은 사회적, 경제적 이익 획득을 위해 정치판에 뛰어들었고 이로 볼 때 마야의 정치 체계는 심하게 복잡하고 얽혀있을 거라 추정된다. 고전기 후기에는 몇 개의 도시들의 힘이 점차 강해져 근처의 도시들을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또 이러한 강력한 하나의 도시를 둘러싼 느슨한 연맹 체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근처 도시의 상류층들을 인질로 가두고 능멸하는 것은 자신의 도시 명예를 매우 높이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군인들은 용감하고 과감하게 전투하여 가능한 수많은 인질을 붙잡고 죽이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처럼 너무 과도하게 명예, 영광에만 중점을 두는 것은 거대한 사회 혼란과 정치적 불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도시와 국가의 경계는 일반적으로 가까이 맞닿은 도시들 사이의 거리 정확히 절반 정도의 위치에 있었으며 협상이나 전쟁 이후에 그 경계를 결정하거나 변경시켰다. 하위 도시들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도시들에 공물, 특산물을 상납하는 식으로 조공을 바쳤고 강한 도시들의 힘은 모두 강한 군사력이 뒷받침된 덕분이었다.

 

마야 문명의 전쟁에 대해 알아보자.

마야 문명에서의 전쟁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각 도시의 지도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자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전쟁 발생의 원인에는 대부분 상대 도시 국가를 무너뜨리려는 목적, 교역로 확보, 전쟁 포로 보유 등이 있었다. 마야의 고전기 예술 작품에는 왕의 영광, 전쟁, 승리 등을 나타낸 상형문자 비석들이 많다. 보편적으로 거의 전쟁을 묘사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형문자와 비석들로부터는 전쟁 발생의 원인, 형태, 전개, 결과 등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자세한 정보를 알 수가 없는 현실이다. 이 당시 마야인들의 전술, 군대, 훈련 방식 등이 구체적으로 잘 알려져 있진 않다. 8세기, 9세기에는 빈번한 전쟁과 내전이 결국 페텐 저지대 서쪽의 국가들을 모조리 몰락하게 했다. 그때 페텐 저지대의 국가들은 인구가 빠르게 줄어들거나 없어져 버렸는데 이 중의 하나였던 아구아테카의 경우 매우 이른 시일 내에 버려지는 바람에 마야 주민들이 제대로 챙길 수 없었던 유물들을 통하여 그 당시 군대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었다. 810년경 아구아테카는 미상의 적들에게 침격을 당했고 이 결과 아구아테카는 결국 무너졌고 궁궐은 불타 없어졌다. 도시 대부분의 권력층은 달아나거나 전쟁 인질로 끌려가 다시는 본국으로 귀환하지 못한 것으로 추측된다. 많은 고고학자가 아구아테카를 연구했는데, 이 결과 마야 군인들 대부분은 지도층 계급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도시에 잔류해있던 사람들조차 얼마 안 되어 이 지역을 벗어났고, 끝내 아구아테카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후고전기 말기 무렵에 마야의 지도자들은 직접 전쟁에 참여했고 이 때문에 전쟁에서 상대편에게 포로로 잡힌 왕들은 모욕과 고문은 물론이고 처형까지 당하는 것이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선고전기 이후에 마야의 왕들은 상당히 엄한 전쟁 수행 능력을 평가받았다. 그들은 가끔 본인이 전쟁 등에서 죽인 군인들의 머리를 자기 허리에 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고전기로 들어서고 나서는 이러한 광경은 대부분 없어졌으나 전쟁에서 인질로 잡혀들어간 군인들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모습을 대신해서 볼 수 있었다. 많은 스페인 출신 연구자들은 마야인들이 이 모습을 그들의 서적에 상세하게 그려 넣어 자손들에게 남겼다고 전했다.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그 패배한 나라에 상당한 충격과 영향을 안겨주었다. 앞서 아구아테카와 같이 도시 자체가 멸망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며 재부흥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나마 최악을 면하는 경우가 전쟁에서 패배한 쪽에서 승리한 쪽에게 매년 조공을 바치는 정도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승리한 도시는 패배한 도시의 지도층들, 신관, 귀족, 왕족들을 전부 노예로 끌고 가거나 희생제물로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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