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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역사학 - 동아시아의 근세, 근대

by 아몬드봄봄 2023. 1. 15.

중국의 근세로 가보도록 하자.

원나라를 굴복시키고 건국된 명나라는 정화의 함대를 보내어 이슬람과 인도 아프리카까지 중국의 존재, 강력함을 널리 알리고 주위의 수많은 국가로부터 조공을 받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부상했지만, 그 후 국가의 한 대문을 닫아버리는 쇄국 정책을 펼쳐서 점점 유럽에 뒤처지게 되었다. 마침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자 명나라는 망하고, 이자성이 건국한 순나라는 청나라의 침입으로 약 1년 만에 멸망해버린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사 인력을 파견하여 일본 세력이 중국 영토에 침입하는 것을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그로 인해 막강한 피해를 보아 북방의 여진족이 만주족으로 개명하고 청나라를 세우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의 유리창 거리에는 여러 서점과 상점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이 서점들에는 청나라, 조선, 일본의 에도 막부 등 전 세계에서 온 많은 나라의 학자들이 모여 열기 있는 토론을 펼쳤고 그곳의 서책들이 이들에 의해 조선으로 흘러들어오게 되어 이른바 북학의 성장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유리창 거리는 동아시아 지식 문화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몽골, 티베트, 위구르 등 이러한 유목민들을 모두 청나라의 영역으로 정복함에 따라 명나라 시기와 비교해 중국의 영역을 두 배 가깝게 팽창시켰다. 17세기 형성된 청나라는 크게 영역을 팽창한다. 강희제는 강희자전을 편찬하여 한자를 완성해 지금의 한자 연구에 있어서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 그 뒤를 이은 건륭제는 백과사전식 책인 사고전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또한 사회, 지리, 경제, 문화, 종교, 언어 등 모든 분야를 하나로 정리하여 학문과 지식이 매우 크게 발달하였다.

 

이러한 언어적인 분야에서 볼 수 있듯 만주족 왕조 청나라의 지도자들은 점차 만주족 본인들만의 문화를 잃어가게 되었다. 만주족 왕조인 청나라는 당연히 만주어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점차 한어가 황실로까지 흘러들어 가게 되고 결국 청나라의 황실마저 만주어 대신 한어(지금의 중국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모든 중국 국민에게 만주족의 문화인 변발을 강요했고 만주족의 전통 의상 치파오가 한족의 전통 의상 한푸를 밀어내고 현재 '중국을 상징하는 의상'으로 발붙이고 있듯 청나라 시대의 만주족 역시 중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때 만주어가 점차 없어지기 시작하여 현대에 만주어는 멸종할 위기에 처해 있다.

 

인도의 근세로 넘어가 보자.

중앙아시아 티무르 제국 왕족 출신인 바부르는 지금의 인도 북부에 무굴 제국을 건국한다. 무굴 제국은 차츰 인도를 통일시키고, 이슬람교를 인도 전체에 널리 퍼뜨린다. 무굴은 인도의 원래 종교인 힌두교와 무굴 제국의 종교인 이슬람교 사이의 갈등을 반대하였다. 공용어로 페르시아어, 아랍어, 힌디어 등을 혼합해놓은 언어인 우르두어를 사용하여 지금의 파키스탄의 국어가 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초반에는 두 종교 사이에 별다른 갈등이 없이 서로 융화되며 잘 지냈으나 아우랑제브 황제 때부터 힌두교를 탄압하고 이슬람교 중심 정책을 펼치면서 차츰 백성의 마음을 잃어 갔다. 알맞은 시기에 프랑스 왕국과 대영 제국 등 유럽 국가들이 인도에 침입하기 시작하면서 무굴 제국은 쇠퇴했다. 무굴 제국의 멸망 이후, 인도는 대영 제국(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무굴 제국은 종교, 언어, 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이슬람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인도의 유명한 관광지 타지마할인데, 대표적인 이슬람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서아시아의 근세를 알아보도록 하자.

서유럽 국가들의 지원으로 그리스가 독립을 이루어낸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은 쇠퇴해지기 시작한다. 오스만 제국은 수도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세계의 상인들이 모이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점차 그 규모가 커졌다. 그 시기,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그리스 등 발칸 반도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또한 이스탄불의 대시장(바자르)을 보고 탄복했다.

 

우리의 한반도로 다시 넘어가 보자. 이제는 근대다.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는 친러 정책을 펼쳤다. 1870년대 초반 일본은 조선에 압력을 시행하면서 이미 영향력을 시행하고 있던 중국과 부딪히게 되었고 조선을 일본의 지배 아래 두려고 하였다. 이러한 근거로 일본은 한반도에서 약해진 자신들의 영향력을 바로잡아 회복하고자 1895년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 이를 을미사변이라 한다.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1897-1910)으로 국호를 새로 단장하였고 고종은 왕에서 황제의 자리로 오르게 되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으로 주변 국가로부터 외면과 침묵을 얻어 낸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에 압력을 시행하여 "을사늑약"(1905)을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고 1907년 한일신협약에 이어 1910년에는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였다. 의화단 운동 진압 당시에 청나라의 만주를 점령하고 있던 러시아가 조선까지 영향력을 시행하는 기미를 보이자 이에 언짢음을 느낀 일본은 러일 전쟁(1904-1905)으로 러시아를 완전히 패배시키고 대한제국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였다. 헌병 경찰제를 시행하여 독립운동과 비밀결사단 등에 대한 감시를 더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 제국은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1910년대 무단 통치라는 방식으로 대한제국을 지배하였다. 뒤이어 3.1운동의 영향으로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져 만주 중국과 시베리아에서 직접 군사 조직을 결성해 일본과 싸워 승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펼쳤다. 게다가 조선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일본인 거대한 자본가들이 한국의 토지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하였고 기존에 있던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또한 여러 철도 등을 설치하며 한반도 내의 물건이나 재료를 이른 시일 안에 일본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해 식민지를 강제로 빼앗았다. 결국 한국인은 일본의 점령에 거역하고자 이곳저곳에서 3.1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무단 통치가 어렵게 되자 일본은 1920년대부터 문화 통치로 통치 방법을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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