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다뤘던 중국과 몽골의 중세 시대를 이어서 보자.
베이징 지역을 수도로 삼았던 시기에, 금나라의 북동쪽 중앙아시아에서는 테무친 몽골족을 통일시키고 자신을 칭기즈 칸이라 칭했다. 동쪽으로는 고려를 굴복시키고, 서쪽으로는 헝가리까지 멸망시켰으며, 이슬람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렇게 시작한 몽골 제국은 동서남북으로 빠른 기간 안에 확장하여 금나라와 남송을 빠르게 굴복시키고 중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한다. 칭기즈 칸의 사후 몽골은 여러 개로 갈라지고 그 중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 현재의 베이징 지역을 수도 삼아 원나라를 세운다. 원에 대항한 반란군의 대장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하고 왕이 된다. 원나라는 몽골 왕조이지만 점차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원은 고려와 연합하여 일본을 침략, 원나라의 일본 대원정을 계획했지만 태풍으로 무산되었고 중국의 원주민인 옛 남송의 한족을 차별하여 민심 얻기에 실패하여 건국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멸망하고 만다.
서아시아의 중세 시대를 알아보도록 하자. (유목민 이슬람 제국)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이러한 3대륙을 전부 지배하던 아랍 제국은 내분으로 갈라져 멸망하게 된다.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차지한 셀주크 제국은 기독교들의 성지 순례를 막았다. 그 이후 중앙아시아 돌궐계 민족인 투르크가 건국한 국가인 셀주크 제국은 이슬람교를 들여오고 엄청나게 성장한다. 셀주크는 페르시아, 아나톨리아 지역을 거의 다 점령하고 동로마 제국을 심하게 위협하였다. 이때 유럽의 교황은 권력 강화를 위한 구실이 필요했기 때문에, 십자국 전쟁으로 셀주크 제국을 쳐들어간다. 하지만 결국에 십자군 전쟁에서 셀주크 제국이 유럽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유럽은 패배했고 그로 인해 유럽에서는 교황의 권력이 두드러지게 낮아진다. 셀주크의 지역 중 페르시아 영역에 화레즘 왕조가 형성된다. 십자군 전쟁으로 국력을 크게 소비한 셀주크 제국은 힘이 약해지고 마침내 멸망하고 만다. 몽골 제국이 분파된 다섯개의 왕국 중 하나인 일 칸국이 이슬람교를 들여온다. 티무르 제국은 페르시아 구역을 전부 차지하였다. 일 칸국의 몰락 후, 몽골 제국의 후손인 티무르가 티무르 제국을 세우고 거대한 침략 계획을 벌인다. 이후 14세기, 티무르 제국은 몰락하지만 그 왕족인 바부르가 인도로 가서 무굴 제국을 건국하고, 19세기까지 인도를 지배하며 번성한다.
아랍 제국 이후 가장 강력한 이슬람 국가였다. 셀주크 제국과 마찬가지로 투르크족 국가인 오스만 제국이 번성하여 프레시아, 아나톨리아, 아라비아 등 중앙아시아 전역을 차지하고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강력한 대국으로 자리 잡는다.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인 술레이만 1세 시대에는 1,000년 넘게 남아있던 동로마 제국을 굴복시키고 그곳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스탄불로 개명시켰다. 최대 진출 영역은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지역이자 현재는 오스트리아 땅인 빈의 코앞까지 진출했을 정도로 유럽 세계에도 대단히 영향을 끼쳤다. 유럽으로 가는 문이 열리자 오스만 제국은 옛 동로마 제국의 지역 즉 다시 말해 발칸 반도 등과 헝가리까지 유럽 남서부까지 영토로 만들었다. 커피와 카피 같은 것들이 바로 그때,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차지했을 때 유럽으로 전해졌다. 지금도 그때 오스만 제국이 차지했었던 유럽 지역의 일부는 여전히 오스만의 후대인 터키의 영토로 남았다.
이제 근세 시대의 한반도로 가보자. 본격적으로 조선시대가 시작된다.
1392년 태조 이성계는 고려 때 위화도 회군을 일으킨 후에 신진사대부와 결합하여 이른바 조선을 세웠다. 새로운 국왕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로부터 조선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아 나라의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또한 바로 이때부터 조선왕조실록이 기록되었다. 그는 명나라에 반기하고자 했던 고려와 다르게, 명과 사대 관계를 유지했으며, 몇몇 행정구역과 정부 체제를 변경하였다. 이성계의 손자 세종대왕이 왕으로 있었던 시기, 우리의 문자 한글이 창제되었고 측우기, 양부일구와 같은 유명한 발명도 나타났다. 따라서 조선을 북쪽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한반도의 남북한을 합한 것과 같은 한반도 모양이 그때 형성되었다. 칠정산, 농사직설과 같이 우리식에 맞는 조선만의 역법과 농법이 백성들에게 전달되었으며, 또한 북방의 여진과 남쪽의 왜구를 무력으로 응징하였고 고려 최무선의 활약을 바탕으로 화차와 같은 군사 무기도 만들어졌다. 조선 연산군은 방탕하고 꽤 폭력적인 정치로 인해 민심과 군신들의 신뢰를 잃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의 명 파병을 비롯한 그 밖의 다른 사정들로 나라의 힘이 약해진 명나라는 북방 영역에 관심을 소홀히 했고, 이에 따라 만주족 왕조 청나라가 건국되었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되었지만 수군을 이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다른 명장들의 투혼과 이곳저곳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끊임없는 저항 그리고 조선으로의 명나라 군사 파병 덕분에 결국 일본 군사를 물리칠 수 있었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치며 실제적인 이익을 만들어내고자 하였으나 명을 떠받들고 청을 오랑캐로 여기는 보수적인 유교 사상을 가진 관리들은 그런 광해군의 실제적인 이익 추구를 좋지 않게 보았다. 그래서 광해군은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지만 결국 1620년대와 1630년대에 걸쳐 조선은 청나라의 침략으로 청나라와 사대관계를 맺게 되면서 조선이 명에게 했던 것처럼 청은 왕의 나라 조선은 신하의 나라가 된다. 19세기로 가게 되면서 프랑스 등에서 천주교가 유입되었지만 유교와의 극심한 마찰로 연이어 후대의 왕들에 의해 탄압받았다. 이후 영조, 정조는 꽤 안 좋게 변질된 붕당 정치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박지원은 수레의 중요성, 즉 이른바 운송 수단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정약용은 공동 경작, 공동 소유라는, 지금 우리가 아는 공산주의와 비슷한 사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제안한 정책들은 기존 보수 관료들이 반대하며 실제적인 조선의 개혁, 개방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보수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유교를 대체하려고 하는 실학이 생겨났는데, 대표적 인물로는 박지원, 정약용 등이 있다. 이들은 서양의 물건들과 교류해온 청나라에서 서양의 문물들을 접하거나 그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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